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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뉴스 동영상] 미얀마:일본인사망~저널리스트 심장관통

일본소식

by 일본뉴스 2007. 9. 2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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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발포로 일본언론인 나가이씨(50) 사망

반정부 시위 취재중 총격으로 사망..탄환이 심장관통..

 

미얀마 무력진압...나가이씨를 포함한 9명 사망

 

http://www.ilovenakama.com

일본나까마, 일본어 홈페이지제작

ミャンマー武力鎮圧 長井さん含む9人死亡

 軍事政権が反政府デモの武力鎮圧に乗り出しているミャンマーで27日、取材中の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が死亡した。ミャンマーの国営テレビは27日の武力鎮圧で、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を含む9人が死亡したと発表した。

 死亡したのは、東京・港区にあるニュースプロダクション「APF通信社」と契約していたジャーナリスト・長井健司さん(50)。長井さんは27日午後、ヤンゴン市内中心部で反政府デモの取材をしていたところ、銃撃を受け死亡した。町村官房長官によると、弾丸が心臓を貫通していたという。

 長井さんはこれまで、主に中東の紛争地などで取材を行ってきたが、今回は25日夜から、ヤンゴン市内に入り、取材活動をしていた。

 一方、ミャンマーの国営テレビは27日のデモ隊に対する武力鎮圧で、長井さんを含む9人が死亡したと発表した。

 

 

미얀마:일본인사망인가 정보수집 쫓기는 외무성
 

 긴장이 이어지는 미얀마에서, 일본인이 희생이 되었다. APF통신사(도쿄도 미나토구(港區))에 소속하는 영상 저널리스트의 나가이(長井) 겐지(健司)씨 (50)이라고 보여져, 최전선에 서 취재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데모 진압 때문에 치안부대가 무차별발포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미얀마의 최대도시 양곤. 군사정권은 강경조치를 내세우고, 결국 시민에게 총구를 향했다.

 나가이(長井)씨는 APF통신의 계약 기자겸 카메라맨이었다. 27일 밤, 동사의 사무소에는 많은 보도진이 몰려들었다. 대응한 야마지(山路) 도오루(徹) 사장(46)에 의하면, 같은 날 오후 8시경에 외무성에서 「미얀마에서 유탄이 닿고, 일본인이 1명 돌아가셨다. 소지하고 있었던 여권이 나가이(長井)씨의 물건이었다. 대사관원을 병원에 향시켜서 최종확인을 집는다」라고 하는 연락이 있어, 이변을 알았다고 한다.

 나가이(長井)씨는 당초 타이·방콕에서 다른 취재를 하고 있었다. 미얀마에서 데모가 일어났기 때문 「취재하고 싶다」라고 청원하고, 25일부터 현지에 들어가고 있었다. 산길사장이 나가이(長井)씨와 최후에 회화를 주고 받은 것은, 27일 오후. 전화로 「현지는 아직 비교적 평온하지만, 이제부터 데모가 시작될 지도 모른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라고 한다. 같은 날 오후 4시반에 다시 전화가 오는 약속이 되고 있었지만 걸려 오지 않았다.

 나가이(長井)씨는 이라크 전쟁이나 팔레스타인(Palestina),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등, 위험한 지역에서의 취재 경험이 풍부. 산길사장은 「거기에 전할 가치가 있으면 과감에 뛰어드는 사람이었다」라고 비통한 표정으로 함께 이야기 했다.

 한편, 일본TV에는 26일 밤의 뉴스 프로그램으로부터 나가이(長井)씨가 등장. 전화로 현지의 모양을 알렸다. 27일 저녁에 연락이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없었다고 한다. 홍보 담당자는 「나가이(長井)씨와는 정식계약하지 않고 있지만, 이라크등의 분쟁 지면의 구획재료의 경험이 풍부하다고 듣고 있었다. 상세를 확인중으로 자세한 코멘트는 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중, 외무성은 직원이 정보수집에 쫓겼다. 외무성 간부는 「현지대사관의 의무관이 사체에 대면했다. 나가이(長井)씨의 가족에게 연락을 취해 신체적 특징을 듣고 있다. 사건 당시의 목격자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이쪽도 정보 기다리기의 상태다」라고 설명했다.

 관계자도 나가이(長井)씨의 안부를 마음을 썼다.

 미얀마에서 몇번이나 취재해 온 카메라맨, 미토메(三留) 다다오(理男)씨는, 「데모대에 섞여서 취재하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그래도 외국인 카메라맨은 눈에 띄어버린다. 일반적으로 유탄에 즈음하여 사망하는 확률은 낮다. 보도되는 것에 약하는 군에서 노려 쏘아진 가능성도 있다」라고 추측. 그리고 나서 「유감스러운 결과이지만, 이 종류의 취재에 어느정도의 위험은 부속물이고, 무장한 군이 비무장의 시민에게 총구를 향하는 사태는 위험을 무릅써라도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라크 취재중에 총격되어 사망한 저널리스트의 하시다(橋田) 신스케(信介)씨의 아내 사치코(幸子)씨는 「미얀마에서 77년부터 00년경까지 남편과 30회 가까이 취재를 했다. 미얀마인은 평소는 얌전하지만, 돌연 심하게 될 것이 있어, 현지에서는 필름 몰수등의 리스크가 항상 따라다닌다. 현지에서 나가이(長井)씨에게 적절한 협력자가 있었던 것인가 아닌가가 마음에 걸리다」라고 함께 이야기 했다.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 2007년9월27일

 
미얀마 이틀째 발포 … 일본 기자 등 9명 또 숨져 
폐쇄·독선 리더십 … 최빈국 전락
1960년대 한국이 부러워하던 미얀마
 
4년 전 미얀마(옛 버마)의 수도 양곤(옛 랭군)을 방문했을 때 50대의 교민은 "시간이 멈춰버린 나라"라고 말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발전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2007년 9월, 이 나라는 정체가 아니라 저만치 후퇴하고 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승려들이 26일 군사정권의 총탄에 또 쓰러지고 말았다. 1988년 3000명의 목숨을 앗아 갔던 군사정권이 19년 만에 다시 거리에 피를 뿌린 것이다.

"군인들이 언제 다시 시위대를 향해 총질을 할지 모릅니다. 국제사회가 나서서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양곤 교민 정범래씨는 26일 밤 태국 방콕으로 피신한 뒤 폭력사태를 전해 왔다.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양곤은 폭염 속에 한 끼 100~200원짜리 국수로 허기를 채우는 인파가 그득하다. 도로는 각국의 폐차(廢車) 전시장 같다. 인권 탄압에 따른 서방의 경제 제재 때문에 최고급 호텔에서도 웬만한 신용카드가 통하지 않는다.

양곤 시내 중심부엔 높이 98m의 '쉐다곤 파고다'라는 거대한 황금 불탑(佛塔)이 있다. 600여 년간 모두 7t의 금을 벽돌에 얇게 붙이는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과거의 영화(榮華)를 한눈에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다. 1960~70년대만 해도 버마는 한국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반도의 세 배에 이르는 국토에서 3모작을 해 아시아 최대의 쌀 수출국임을 자랑했다. 땅과 바다에는 각종 천연자원이 묻혀 있는 자원 부국이다. 그런 국력은 축구에서도 입증됐다. 70년대 초반의 '박스컵(박정희 대통령배)' 대회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려는 한국팀에 미얀마는 높은 벽이었다. 61년부터 11년간 유엔 사무총장으로 국제무대를 누볐던 우탄트도 바로 이 나라 출신이다.

하지만 지금 미얀마는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안팎인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전문가들은 "독립(1948년)과 네윈 군사정권(62년)을 거치는 과정에서 '버마식 사회주의'를 채택해 폐쇄.자주 노선에 매달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네윈 군사정권 시절 고립정책 속에 부패와 빈곤이 누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들어선 군사정부도 자급자족 경제를 추진했다. 대부분의 민간기업과 천연자원을 국유화했다. 외국인 직접 투자는 자연히 끊어졌다. 그 결과 일부 특권층과 화교를 뺀 5400만 국민은 빈곤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폐쇄와 독선을 내세운 리더십이 빚은 비극이다.

국제전문가들은 군사정권으로는 미얀마의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아예 찬 나임(32)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어둠과 폭력의 시대를 끝내려면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양수.박소영 기자


◆양곤의 봄=1988년 8월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당국이 쌀값을 올리자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8월 8일 군사정부가 시위대에 발포하자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났다. '8888운동'이라고도 한다. 이때 희생된 사람이 3000명에 달한다. 아웅산 수치 여사를 비롯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지도부가 체포됐고, 그 이후 수치 여사는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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